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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사회음악에 끼친 영향
개화기 학교음악과 사회음악에 ...
교회에서의 찬송가 수용
개화기 찬송가의 수용 과정
찬송가의 유입 및 수용 과정
개신교 찬송가의 유입 과정
개화기 30년간 개신교 찬송가...
찬송가의 유입 및 수용 과정
작성 : praisenews   2013-05-10 17:32    조회 : 1011    추천 : 0   

2. 찬송가의 유입 및 수용 과정

 

(1) 중국어 찬송가의 유입 및 수용

앞에서 언급한대로 중국은 한국보다 80여년 앞서 개신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국의 개신교가 시작될 무렵 중국은 이미 중국어로 되어 있는 서양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 땅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이 찬송가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로부터 전도를 받았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등 한국 최초의 개신교인들은 한국어 찬송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중국어 찬송가를 접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중국어 찬송가를 중국인들이 부르는 그대로 부르게 되었으나 남의 나라 말이라 의미전달이 안되며 부르는 불편함이 있어서 이들이 한국에 돌아와 전도를 할 때에는 중국어 찬송가를 한국식 발음으로 즉, 한문 글자를 한국말 발음으로 노래하였으며, 예배드릴 때에도 한 동안은 이러한 방법으로 찬송을 부른 정황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18835월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 교회를 설립한 서상륜과 의주교회를 이끌었던 백홍준은 예배드릴 때에 중국 찬송가를 중국어 그대로 사용하거나 또는 중국어음을 한국식 발음으로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은은 초창기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로서 처음에는 중국어로 부르다가 1884년 이후 부터 한자어를 한국식 발음으로 불려 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새문안 교회 최초의 장로 중 한사람인 백홍준 장로의 여식 백관성은 아버지가 매일같이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시고 작은 소리로 주 예수 애워, 주 예수 애워라는 찬송가를 부르셨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 찬송은 <예수 사랑하심은>(현재의 찬송가 411)의 후렴 부분인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의 한자에 해당하는 主 耶蘇 愛我, 主 耶蘇 愛我를 한자의 우리말 만 따서 한국식 발음으로 바꾸어 부른 것이다(악보1참조). 이 완전히 번역되어 공식적으로 불려 진 것은 3년 이후의 일이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예수사랑 하심은1887년 크리스마스 때 벧엘교회에서 불렸는데, 이것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불린 최초의 노래로 추정된다,

이 당시 한국어로 번역된 찬송가 이전에 중국어 찬송가를 그대로 불렀거나 또는 한자음을 따서 불렀다는 다른 근거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기선교사 아펜젤러가 죠션 교회에서 지나 찬미에서 얼마를 써 보앗스나 한문에 너무 흘러 부르나 그 뜻을 알 수 업섯스며.....”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초창기 한국개신교는 한자로 된 중국어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94년에 출판된 언더우드의 찬양가의 목차가 한문 목차와 함께 한글 목차도 수록되어 있는 것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특히 1894년에 출판찬양가는 대부분 중국어 찬송가를 한국 사람들에 의하여 번역된 것으로서 이 찬송가 출판이후 중국어 찬송가를 더 이상 부르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영어 찬송가의 유입 및 수용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들어올 때 영어로 되어 있는 성경과 찬송가를 가지고 왔다. 교육 사업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가지고 온 성경과 찬송가를 교육 자료로 최대한 활용하였다. 처음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영어로 기초적인 성경이나 찬송가를 직접 가르쳤다. 당시에 한국어로 된 찬송가가 출판되기 이전이었으며 개신교 찬송가를 불러본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야 할 시절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서 선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처음에는 영어 찬송가를 통역하는 사람도 없이 영어로 직접 부르도록 가르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화학당의 초기 졸업생인 김룻세가 처음 학교에 들어오니까 소꿉질을 하게하고 주기도문, 또는 찬송가를 영어로 가르쳐 주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통역도 쓰지 않고 대뜸 영어로 가르쳐 주었다라고 언급한 것을 볼 때 번역찬송가 나오기 이전까지 영어로 직접 부른 것으로 본다.

한편 1890년에 설립된 인천의 영화여학교에서도 음악을 가르쳤는데 창가 시간에는 영어찬송가를 가르쳤으나 얼마 후에 영어를 한글로 번역해서 가르쳤다라는 기록을 볼 때 초창기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학당에서 초기에 영어 찬송가를 직접 영어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이 처음에는 영어로 한 소절 노래하면 학생들이 듣고 그대로 따라 부르는 방법이 사용되어졌다. 찬송가 부르기는 개신교 예배 의식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의 하나이기 때문에 수업시간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찬송가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 영어 찬송가를 가르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잘 모르는 상태였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찬송가도 없었고 찬송가를 가르칠 만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며 둘째, 영어로 된 찬송가이지만 그 속에 복음전인 내용이 들어 있어서 선교적 기능이 있기 때문이며 셋째, 아동들로 하여금 영어를 습득하여 장차 의사소통은 물론 외국어에 대한 눈을 뜨도록 함이요, 끝으로 그 당시에 음악 수업에 적절한 교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선교사업 특히 교육 사업을 지속시키고 더 많은 아동들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선교사들에 의하여 영어 찬송은 한 두곡씩 학당에서 번역되기 시작하여 1888년경부터 전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이 당시 교회와 학교에서 한국 개신교 신도들이 잘 부르고 좋아하는 번역된 찬송가들이 최초로 출판된 찬미가로부터 시작하여 찬셩시등 향후 악보 없이 영어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소개되었다. 특히 1895년에 출판된 찬미가는 당시 미국 감리교에서 사용되고 있던 감리교 찬송가의 수록번호, 영어제목, 페이지 및 번역된 한국어 가사를 수록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 신도들은 전국적으로 번역 찬송가를 사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