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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찬송가의 유입 과정
작성 : praisenews   2013-05-10 17:20    조회 : 860    추천 : 0   

. 개신교 찬송가의 유입 과정

 

한국에서 선교 목적을 갖고 상주하고자 하는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5년 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한국 땅에 여러 명의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찾아 왔으며 특히, 선교사 입국 이전에 이미 한국 땅에 수백 명의 한국인 개신교 신자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최초의 한국인 개신교 신자들과 초기 선교사들에 의하여 한국 땅에 개신교가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찬송가도 함께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개신교 유입과 찬송가의 유입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개신교 유입 배경

 

(1) 중국으로부터의 개신교 유입

중국은 한국보다 서양문화를 일찍 받아드린 결과로 개신교가 한국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중국에 있어서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는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리슨 선교사가 중국 광주에 도착한 날은 180797일 즉, 주일 저녁 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중국은 한국보다 80여년 앞서 개신교가 유입되었다고 본다. 모리슨 선교사의 뒤를 이어 수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 왔으나 그들 중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졌던 선교사들은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아니 하였다.

1867년에 알렉산더 월리암(Alexander William)목사가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거나 상거래를 많이 하였던 만주의 고려문(高麗門)에서 전도를 시작하였다는 간략한 기록이 있으며, 한국인 선교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던 스코틀랜드 장로회 선교사인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목사와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7-1905)목사가 1872년부터 만주의 우장과 고려 문에서 전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국보다 먼저 중국에 개신교가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처남과 매부지간인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는 일찍이 영국인으로 한국에 선교 차 왔다가 1866년 순교한 토마스 목사의 유업을 계승하여 한국 선교를 해보려는 소망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때문에 이들 선교사는 만주에서 중국인 보다는 한국인을 상대하여 선교를 하였고, 기회만 있으면 한국에 직접 와서 선교하려고 하던 차 한국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에 만난 한국인이 바로 이응찬 이었는데 이 사람은 만주를 오가며 상업에 종사하던 의주 사람으로서 후에 로스목사의 한국어 선생이 되었으며 1876년 맥킨타이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개신교인이 되었다. 이밖에 이성하, 백홍준, 그리고 김진기 등이 모두 만주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중에 백홍준은 1883년 의주로 돌아와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의주 상인이었던 서상륜은 만주에서 1881년 로스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개신교인이 되어 그와 함께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였으며, 마침내 어렵게 출판한 성경을 품에 품고 국경을 넘어 제2고향인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의 소래와 서울을 왕래하며 복음의 씨를 뿌림으로써, 한국에 역사적인 민족 교회를 탄생시키는 위업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별히, 그는 자기 동생 서경조의 도움을 받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의 한 초가에서 18835월 첫 예배를 드림으로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하여 외국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한국 개신교의 초석을 놓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중국 선교를 목표로 미국 북 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인 알렌이 188310월 중국 상하이에 부임하였다. 1년 뒤 한국 선교로 임명받은 알렌(Horace N. Allen)1884920일 중국 땅을 떠나 제물포로 입국함으로써 한국에 선교의 첫발을 디디었다. 1885628일 주일 의료선교사 알렌의 집에서 헤론부부, 스크랜톤 모자, 그리고 알렌 부부가 모여 외국인 선교사로서 한국선교사상 최초의 주일예배를 드렸다.

 

(2) 일본 땅으로부터의 한국선교 태동

한국보다 서양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은 기독교 복음도 한국보다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본 땅은 한국 선교의 전 초적 기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신문물에 눈을 뜬 조선 왕조의 고종황제는 1882년 박영효를 단장으로 하는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함에 따라 당시 홍문관 교리인 이수정이 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 땅을 밟게 되었다. 농업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의 농업계의 대표적 인물인 농학 박사인 쓰다센(津田仙)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성경을 탐독하던 중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마침내 1883429일 일본에 건너 간지 9개월 만에 로개쥬초 교회에서 야스카와(安川) 토우루 목사로부터 세례문답을 받은 후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 (George W. Knox)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은 한국 땅에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이러한 사정을 18844월 이후 여러 차례 세계 선교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World)에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는 글을 게재함으로서 미국을 비롯하여 해외의 개신교계에 한국 선교의 관심을 갖도록 촉구하였다. 이수정은 세례 받은 이후 일본에서 손붕구(孫鵬九)를 비롯한 여러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 중 몇 명이 세례를 받는 등 신앙공동체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18836월경에는 개신교인이 12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이수정은 이들을 교육하기위해서 624한문요리문답서를 교재로 하는 주일학교를 개설하였다. 이 모임은 점차 발전하여 미국 선교사들이 방문하여 성경을 가르치는 일종의 성경 연구회로 확대되었고, 더 나아가 주일 마다 설교자를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이 1883년 말 도쿄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였다. 이러한 이수정의 복음 전파는 계속되던 중 마침 일본에 체류 중이던 개화당의 이동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을 이수정이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소개하여 서구 지식을 배울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윤치호를 비롯한 여러 유학생들에게 전도하여 18857명이 예배를 개최한 것이 후에 동경유학생 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한편 이수정은 야스카와 목사 및 낙스 선교사의 지도로 성경연구에 전념한 결과 1885년에 마르코의 복음서를 번역하여 한글 성경인 신약 마가젼 복음서 언해를 마침내 출판하게 되었으며, 이 복음서는 같은 해 4월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의하여 한국 땅에 전해지게 되었다.

한편 복음을 받아들였던 유학생 중 윤치호(1865-1945)는 한국 최초의 남 감리회 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남 감리교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하도록 요청하여 18968월 한국 선교의 관리 책임자로 레이드(C. E. Reid)목사가 내한 하는데 공헌하였다. 기타 소수의 유학생들이 개신교 신자가되어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일본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던 이수정도 1886512일 귀국하여 복음을 전파 하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일본 땅에서 처음으로 개신교를 받아들인 한국 사람으로서 이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의 개신교는 일본 땅으로부터도 유입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한국에 복음 전파를 위하여 일본에서 문서 전도 사업을 진행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 루미스(Henry Loomis)와 스코틀랜드 선교사 톰슨(J. A. Thomson) 및 일본인 미우라(三浦)와 스가노(菅野 ) 부부가 한국에 성서보급소를 설립하고자하는 노력이 있었다. 18844월 톰슨은 미우라 부부를 동반하고 자신이 직접 부산을 방문하였는데, 동래 부사의 영접을 받으며 성서보급소를 세울 수 있었다는 기록과 18867월에 톰슨은 제물포를 방문하고 세이노(Seino)로 하여금 제물포에 있는 성서보급소를 운영하였다는 기록을 살펴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에서 복음을 받아드린 후 세례 받은 이수정과 몇몇 유학생들, 그리고 한국에 성서보급소를 세워 운영하도록 주선한 인본인의 활동으로 볼 때 한국에 개신교가 유입되는 데에 일본도 조금은 전 초적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3) 미국으로부터의 개신교 유입

18824월 한미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고 한국과 미국 간에 외교 관계가 수립된 후 한국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선교사는 중국 선교를 목표로 했던 의사 알렌이었다. 그는 1883년 미국 북 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중국에 부임했는데, 1년 뒤 한국 선교의 권유를 받고 18849월 주한 미국 공사관 공의자격으로 한국에 입국 했다. 그는 한국에 주재하는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선교사역을 할 수 없어 공사관 부속의사로만 재직하였을 뿐 이었다. 한국에서 공식적인 선교사를 받아들인 것은 이후의 일이였다. 18836월 전권대신 민영익을 비롯하여 수행원 11명이 친선방문차 미국에서 열차로 여행할 때 볼티모어의 가우쳐(Goucher)대학 총장으로 있는 존 F. 가우쳐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가우쳐 총장이 한국 실정을 듣고 한국 땅에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미국 내 해외 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제의하며 여러 곳에서 선교 기금을 모금하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선교 차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맥클레이(Robert S. Maclay)박사에게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릴 수 있도록 준비케 하였다. 미국 선교 본부로부터 명을 받은 맥클레이 박사는 한국에 입국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한국에서 교육 및 의료사업을 할 수 있도록 간곡히 요청하자 마침내 고종황제가 한국선교를 윤허하게 되었다.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은 최초의 선교사가 바로 맥클레이 박사라고 하는 점은 다음의 기록이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신교회 선교사로서 한국 선교를 위해서 공공연하게 합법적으로 한국 땅을 밟고 제일 처음으로 서울 장안에 들어선 이는 일본 주재 감리교회 선교사인 맥클레이 박이었다. .... 그러나 관계 방면에 연락을 취하고 한국 방문의 임무를 밝히고서 당당히 합법적으로 입국한 이는 맥클레이 박사 부처가 그 최초의 인물들이었다. 6개월 전에 미국 감리회 선교 본부로부터 한국에 나가서 전도의 길을 열어 놓으라는 지시를 받은 맥클레이 박사는 연구와 연락에 반년 동안의 시일을 허비한 후 188468일에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장기를 경유해서 623일 제물포에 도착. 일본에서 김옥균을 통하여 한국에 선교 사업을 원한다는 고종 황제께 요청한바 황제로부터 윤허를 받아 한국에 개교의 길을 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의 실정을 보고 받은 미국 선교본부는 한국 땅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되어 마침내 교육 및 의료 담당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속속 입국하게 되었다. 이들 중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서 한국 땅에 파송한 공식적인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와 미국 장로회의 공식적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Grace H. Underwood, 1859-1915)는 같은 배를 타고 18854월에 한국 땅을 밟아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최초로 서양식 학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뒤를 이어 미국 감리교 최초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 1856-1922)목사 부부와 모친인 스크랜톤(Mary F. Scranton 1832-1909)은 한국에서 최초로 여성을 위한 서양식 학교 교육과 의료 선교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