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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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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학교음악과 사회음악에 ...
교회에서의 찬송가 수용
개화기 찬송가의 수용 과정
찬송가의 유입 및 수용 과정
개신교 찬송가의 유입 과정
개화기 30년간 개신교 찬송가...
교회에서의 찬송가 수용
작성 : praisenews   2013-05-10 17:35    조회 : 1162    추천 : 0   

2. 교회에서의 찬송가 수용

 

(1) 예배음악 자료로서의 찬송가 수용

한국으로 찬송가를 가지고 들어와 학교이외에 교회에서도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보급한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이 1887년에 설립된 정동감리교회와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도 찬송가의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이들은 선교목적으로 세운 학교이외에 교회내의 주일학교(교회학교), 성경 학교, 그리고 신앙 훈련과 성경공부를 위해 개최되는 사경회에서 그들이 직접 찬송가를 가르치거나 또는 한국 지도자들을 훈련하여 찬송가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1883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에 소래교회가 세원진 이후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불린 찬송가는 중국어 찬송가였다. 초기에는 이 중국어 찬송가가 한국어로 몇 편씩 번역되어 불려 졌다. 그러나 점차 미국 선교사들의 등장으로 영어 찬송가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사용되어졌다. 한국으로 찬송가를 가지고 들어와 학교이외에 교회에서도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보급한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이 가지고 온 영어 찬송가는 학당이나 예배처소의 사정에 따라 처음에는 한 두곡씩 나오기 시작하였다. 초기 선교사들이 1887년에 설립된 정동감리교회와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도 찬송가의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이들은 선교목적으로 세운 학교이외에 교회내의 주일학교(교회학교), 성경 학교, 그리고 신앙 훈련과 성경공부를 위해 개최되는 사경회에서 그들이 직접 찬송가를 가르치거나 또는 한국 지도자들을 훈련하여 찬송가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여러 개의 찬송가들을 한데 모아서 한권의 곡() 집으로 출판된 것은 1892년에 이루어졌다. 한국에서 최초로 출판된 찬미가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존스(George H. Jones)목사와 로드와일러(Louis G. Rothweiler)양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진 소책자로서 당시에 사용되던 번역 찬송 27편이 수록되었다.찬미가에 수록된 찬송가들은 영어 찬송가를 번역한 찬송가로서 이 당시 교회와 학교에서 한국인 신도들이 잘 부르고 그리고 좋아하는 50여곡 중 27곡만을 선정하여 악보 없이 가사만 수록된 일종의 가사 집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찬미가는 한국 최초의 찬송가라는 의미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겠으나 다만 악보 없이 가사만 수록 한 것이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3년 후 존스목사와 로드와일러양은 이전에 발간된 찬미가를 수정하고 보충하여 다시 찬미가를 발간하나 이 찬송가 역시 악보 없이 가사만 8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찬송가는 다시 미국 감리교단 교회 예배에서 사용하는 것들로서 81편 모두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는 18944성부 악보가 첨부된 찬양가를 발간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왓츠(13)와 웨슬리(7)의 찬송을 비롯한 18, 19세기 영국계 찬송 60여 편과 블리스(P.P. Bliss)의 찬송5편을 포함한 19세기 미국 찬송 20여편 등 영국과 미국의 복음적 찬송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나 중국어로 되어 있는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 이서서 리듬과 가사의 흐름이 부드럽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악보2 참조).

그러나 이찬양가는 한국에서 한국어로 출판된 최초의 4성부 곡조로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으며, 처음으로 한국인의 창작 찬송시가 7편이나 수록되었다는 것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 밖에 초기 개신교도들은 물론 현재의 개신교들이 즐겨 부르던 찬송가들이 여기에 많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감리교가 1896년에 찬미가, 침례교가 1900년에 복음찬미, 성결교가 1911년에 복음가, 등을 각각 출간하여 교단별로 사용하다가 향후 1946년에 장로교와 감리교 및 성결교 3개 교단이 연합하여 기존 찬송가를 통합한 합동찬송가를 출간함에 따라 각 교단이 같은 찬송가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번역된 찬송가를 예배드릴 때에 잘 부르기 위하여 교회학교 및 성경학교의 수

업 시간에, 사경회에서, 그리고 성가대에서 찬송가를 가르쳤다. 특히, 미국 선교사 모우리(Eli M. Mowry)박사는 1909년 처음으로 조직된 장대현교회의 성가대에서 한국 땅에서는 처

음으로 사성부(四聲部)로 되어 있는 찬송가를 가르쳤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최초 합창은 찬송가로부터 시작되었다.

(2) 교회 부흥운동에서의 찬송가

교세의 확장과 신자들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하여 미국선교사들에 의한 찬송가 출판은 계속 이어져 갔다. 장로교회의 공인 찬송가인 찬셩시가 발간되었다. 이것은 1895년 평양주재 장로교 선교사 리(Graham Lee)와 기포드(M. H. Gifford)의 공편으로 54편이 수록되어 있다. 차후 10년 후인 1905년에 4성부 악보와 함께 몇 곡을 추가하여 재 발간되었다. 이 찬송가의 특징은 처음으로 독일코랄(Chloral)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수록된 것으로 한국 땅에 영국과 미국은 물론 독일작곡가에 의한 찬송가도 사용되어졌다. 따라서 1896년 이후 한국 땅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던 찬미간1 찬양가찬셩시등 모두 3개의 찬송가가 있었다. 그러나 각 교파 선교단체에서 통합된 찬송가 간행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특히, 장로교와 감리교의 공용 찬송가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특히, 장로교와 감리교의 공용 찬송가의 필요성 때문에 이전에 출판된 찬송가의 번역을 수정하고 보충하는 등 보다 세심한 노력으로 1908찬숑가가 출판되었다. 이 찬송가는 한국 땅에서 가장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정신을 토대로 두 교파간의 공용으로 사용된바 1908년 이후 20여 년간 43판 발행에 총 87여 만부가 출판되었으며 향후 이 찬송가를 토대로 다른 교파에서도 여러 곡집이 추가로 출판되면서 한국 땅의 개신교인들은 거의 한사람이 한 개의 찬송가를 가지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3) 교회 학교 및 성경학교에서의 찬송가

한국에서의 최초 교회 성장기는 1885년부터 1894년 최초의 4성부 찬송가가 출간되기까지의 약 10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중 황해도 지역의 예를 들어 보면, 1899년에 내한하여 선천지역에서 선교사로 있던 샤록스(Alfred M. Sharrocks)의 보고서 중 지난 해 선천교회에는 6,507명의 신자가 있었다. 금년에는 신자가 11,943명으로 증가하였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초기 교세가 얼마나 확장되어 갔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교세 확장은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이와 같은 급속한 교회 확장과 함께 모여드는 아동들을 위하여 선교사들 또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안에 유년주일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그들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쳤다. 1888115일 서울 정동 이화학당내에서 어린이 12, 부인 3, 여선교사 4명이 모여 성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 한국에서 시작된 최초의 주일학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유선의 문헌에 “18887월에 부녀자와 어린이를 위한 주일학교 조직을 보게 되었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이때에 한국에서 유년주일학교가 여러 지역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97년에 이르러 평양에는 유년주일학교 다섯이 설립되었고 교재도 인쇄된 것이라고 보고된 것을 볼 때 이후 주일학교 숫자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어린이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시작된 주일학교에서 찬송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였다고 본다. 이 시기에 교회 내에서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쳤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한국 전역에서 1900년 이전에 일반 아동들이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으며, 특히 지방에서 아동들이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의 아동들은 한국 민요나 혹은 전래동요 등을 듣고 부르는 정도였으나 찬송가를 통하여 처음으로 서양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들이 아동들의 실생활로 옮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주일학교는 아동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침으로서 아동들의 정서교육은 물론 음악적 재능을 계발시켜주는 단순한 교육적 기능을 뛰어 넘어 향후 어린이 찬송가가 발간됨에 따라 아동의 생활음악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한편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복음 전도 사업을 목적으로 여러 곳에 학교를 세웠으나 재정문제로 또는 교사문제로 지방도처에까지 학교를 세울 수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선교부가 설치된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지방의 개 교회까지 미국의 성서학교와 비슷한 성서학원 혹은 성경학교를 개설하였다. 이와 같은 성서학원 혹은 성경학교에서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친바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점차 서양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특히,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가 또는 교회 음악가가 되고자 하는 동기 부여가 되었다. 초기 한국의 음악교육은 학교교육 못지않게 개신교의 각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의 음악교육의 선구자인 김인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 당시에 음악을 배운다면 누구나 종교관계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왜 그러나하면 그 당시의 음악이라는 것이 대개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하 여 수입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음악을 배운 동기에 있어서 더욱 그 러하니.... 풍금 치는 것이며 찬미하는 것을 몹시 흥미 있게 듣던 나머지 11(1896)에 숭덕학교에 들어가서 창가를 열심히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가를 배운 음악적 경험이 학생들에게 음악 교육의 터전이 되고 있다. 그 밖에 교회에서 부속으로 개설되는 성서학원 또는 성경학교에서 개인에게 혹은 성가대를 조직하여 찬송가를 가르침으로 많은 교회음악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성서학원, 성서학교, 혹은 성경학교 등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존 당시 어떤 선교부에 소속되어 있는 교회의 학교는 337개교인데 그중 334개교가 전적으로 자비로 운영되고 있다고 보고된 바 있다. 이 많은 학교에서도 처음에 찬송가 가창이 중요한 교과목의 하나로서 운영되었다. 그러나 재정의 뒷받침이 없는 학교는 문을 닫거나 혹은 재정의 뒷받침이 충분하였던 학교들은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향후 국가가 인정하는 정규 중등학교로, 신학교로, 혹은 신학대학으로 발전함에 따라 찬송가 가창에서 교회 음악으로 또는 일반 음악으로 교과 과정이 바뀌어 운영되었다. 따라서 매주 마다 모이는 주일학교와 교회의 부설로 운영되는 성경학교에서 아동들이 찬송가를 배움으로서 음악적 경험을 통하여 재능 개발은 물론 정서 함양에도 큰 도움을 받았으며 이들이 성장한 후 한국의 교회 음악 지도자로 크게 이바지 한 기록을 볼 수 있다.

 

(4) 사경회에서의 찬송가

 

사경회(혹은 사경반)1890년에 서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7명과 함께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처음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경회는 부흥회로 발전하여 새로운 대중 집회의 경험을 제공하였다. 개화기에 평신도들이 찬송가를 배울만한 적합한 장소로는 소수의 기독교 학교와 교회뿐이었기 때문에 사경회에 평신도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찬송가를 가르칠 만한 사람들은 선교사들과 소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 뿐 이었기 때문에 찬송가를 배우고자하는 평신도들은 자발적으로 사경회 장소로 모이게 되었다.

이 당시의 사경회는 해마다 몇 차례 개최되며 사경회에 참석한 전력에 따라 초고 반으로 나누어 운영되었다. 중앙에서 큰 사경회가 개최되면 여기에서 배운 수강생들은 본 교회로 돌아가 선교사와 지역 지도자의 감독과 지시로 작은 규모의 사경회를 열었다. 이 당시에 활동하였던 평양 선교사 블레어 목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각 교회와 수많은 시골에서 개최되는 사경회와 순회사경회 이외에도 각 선교 지부는 한 번이나 그 이상 각 교회 대표들이 참석하는 도사경회를 열어 10일이나 두 주일 동안 사경회와 수련회로 보냈다. ... 이 도사경회는 8개 혹은 그 이상의 부분으로 나뉘어 각 부분은 새벽기도회 시간과 30분간의 찬송시간 외에도 3시간 내내 하는 성경 시간이 있었다.

 위에서 블레어 선교사가 증언한 바와 같이 사경회가 열리는 기간 동안에 매일 찬송가를 배우고 부르는 시간이 있었음을알수 있다.

1892찬미가, 혹은 1894찬양가, 등 공식적인 찬송가가 발간되기 전에는 이렇다 할 교재가 없었기 때문에 사경회가 열리는 동안에 그 당시 잘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만을 큰 족자에 써서 이것을 교재로 사용하였다. 선교사 혹은 한국 교사가 한 소절을 선창하면 평신도들이 그대로 따라 부르는 방법으로 찬송가 가창교육이 실시되었으며 평신도들은 별도의 교재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그 가사를 외워서 불러야만 했다.

사경회는 중앙에서 점차 지방으로 옮겨져 개최되었으며 한 동안 전국에서 큰 호응을 일으켰다. 이런 식으로 1906년 북부지역에서만 191회의 사경회가 열렸고 수강생이 1만 명이 넘는다고 장로교 선교부에 보고된 바 있다.예를 들어, 1906년 평양 주재 선교사들이 개최하는 사경회는 보통 1주간 또는 10일에서 2주간 지속되는바 남성을 위한 평양 대사경회는 연중 1월 첫 2주간 실시된다. 여기에서 새롭게 배우는 찬송가는 수강생들을 통하여 전 지역 교회에서 전달 강습을 통하여 다른 평신도들에게 배움이 이어져 갔다. 사경회에서 배울 기회를 놓치거나 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선교사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며칠 또는 몇 주일 동안 찬송가 부르기를 배워 가지고 자기 본 교회로 돌아가서 다시 신도들에게 가르치었다. 이와 같이 부흥회 혹은 사경회에서 열광적인 찬송가의 제창은 각 교회의 회중 찬송가 부르기 수준을 높였을 뿐 만 아니라 향후 개화기의 창가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5) 교회 성가대(찬양대)에서의 찬송가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서 찬송가를 많이 배우며 많이 부르는 그룹은 성가대 이다. 그리고 찬송가를 가장 음악적으로 다루어지는 곳도 성가대 이다. 다시 말해서 성가대는 찬송가를 잘 부르는 그룹이다. 한국에서 최초의 성가대는 두말할 나위 없이 초창기 발행한 찬송가들을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성가대는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조직된 것이 아니라 몇 단계를 지나서 그 체계가 잡혔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때에 한국 땅에는 선교사가 들여온 찬송가외에는 다른 교회음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음악을 연주할 만한 사람도 그룹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들을 풀어주며 그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1902613일 아펜젤러 목사 추도예배에서 회중들이 다함께 부르는 찬송 이외에 찬송가를 사중창으로 부른 기록과 찬미 181 .... 이화학당 여학생들 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추정들이 사실이라고 본다. 그리고 1900년대 초 원산과 평양에서 일기 시작한 대 부흥운동은 찬송가의 열의를 더욱 증가시켰고 예배시의 찬양에도 큰 발전을 가져왔다. 이 찬양의 열기는 예배에서 정선된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그룹인 성가대(찬양대)가 조직되었으며 이 조직을 통하여 제창으로만 부르던 찬송가를 합창으로 부르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4성부 합창하는 성가대는 1909년 내한하여 평양숭실학교 교사로 시무하던 모우리(E. M. Mowry) 선교사에 의하여 비롯되었다. 그는 장대현교회 찬양대를 조직하고 그 지휘자로 4부합창의 훈련을 시켰다. 이것이 곧 한국 최초의 성가대이다. 이때의 성가대 조직은 기독교학교에서 음악교육을 담당하거나 또는 교회를 세운 선교사들의 노력이 절대적이었으며 이들이 사용한 성가대 용 악보는 오로지 한국어로 발행된 번역 찬송가 뿐 이었다. 이 당시의 찬송가 합창 훈련에 대하여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특히, 모우리 선교사가 초기 찬송가 합창지도 활동에서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다음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모리(Mowry) 박사는 장대현 교회에 찬양대를 조직하고 지도했으며 먼 밤 길을 초롱불을 들고 다니며 일주일에 두세 번씩 왕래하면서 합창단을 지 도하였다..... 당시 반음이 없는 4음 음계에 젖은 한국 사람들에게 서양식 찬송가를 가르치는 일도 어려운 일인데 사성부(四聲部)합창을 훈련시킨다 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10년 새문안교회, 종교교회, 정동교회가 성가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향후 한국의 여러 교회에서 성가대가 속속 조직되었고 사용되는 악보도 처음에 번역찬송가를 그대로 부르던 수준을 넘어 점차 찬송가를 편곡하여 합창으로 불렀으며 찬송가 외에 다른 성가곡도 부르기 시작하였다. 특히, 성가대의 성가 합창은 성가대원 자신의 독보력, 청음력, 화음감, 등의 음악적 수준을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화음을 전달하여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서양음악의 합창을 들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향후 성가합창은 교회와 학교 및 사회단체로 까지 확산되어 전도를 위한 합창공연을 갖기 위한 음악 전도대를 조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초대 교회의 성가대 또는 찬양대는 찬송가를 처음에는 제창으로 부르기 시작하다가 점차 4성부 합창으로 부르게 된 그룹으로서 이들을 통하여 한국의 교회음악 수준을 한 차원 높였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