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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의 찬송가 수용
개화기 찬송가의 수용 과정
찬송가의 유입 및 수용 과정
개신교 찬송가의 유입 과정
개화기 30년간 개신교 찬송가...
개화기 찬송가의 수용 과정
작성 : praisenews   2013-05-10 17:33    조회 : 1242    추천 : 0   

. 개화기 찬송가의 수용 과정

 

한국은 1876(고종13) 2월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 서양의 여러 나라 즉, 미국, 영국, 러시아, 및 프랑스, 등과 수호조약 혹은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쇄국의 문이 열리고 종래의 봉건적인 사회질서에서 근대적 사회로 바뀌는 시기를 맞게 된다. 이때부터 한국은 근대문명이 시작된다고 하여 소위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부터 1910년 한일합방 때 까지 능동적인 개화가 이루어졌던 30여년을 일반적으로 개화기라고 한다. 근대문명의 개화와 더불어 서양음악의 개화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왜냐하면 개화기의 음악교육을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부터 한일합방이 체결된 1910년 사이로 잡은 것은 서양 음악이 1886년에 들어와서 1895년에는 나름대로 정지를 끝내고 1896년부터 1910년 사이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유입된 서양의 개신교 찬송가가 학교 및 교회와 사회의 음악 분야에 어떻게 수용 또는 사용되어 졌으며, 그리고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1. 학교에서의 찬송가 수용

 

(1) 서양식 학교 설립의 배경

선교사가 한국 땅에 입국한 1885년 이전에 평민들이 공부 할 수 있는 오늘날과 같은 근대식 초중등학교는 한국 땅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더구나 일반 아동들에게 음악을 가르친 곳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 시기에 평민을 위한 사설 교육기관인 서당, 양반 자제를 위한 향교(1894년 이후 교육 기능이 상실됨), 중앙의 관학인 4(4부 학당), 그리고 서울에 성균관 등의 교육기관이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음악교육과 관계가 없었으며, 단지 전통음악을 가르치는 정악원이 있었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물론 일부 지방에서 한국 전통음악인 민요와 민속음악 또는 가사와 시조 등은 한 스승 밑에서 배우는 도제형식과 같은 개인지도가 있을 뿐 이었다. 1883년에 설립된 통변학교가 있었으나 단순히 통역관을 양성하기위한 일종의 양성소에 지나지 않았다. 1885년에 고종황제가 서울 주재 미국대사를 통하여 유능한 미국교사 세 사람을 초청하여 18865월에 설립한 육영공원에서 신식교육을 담당케 한 것이 한국의 최초 서양식 교육기관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서민들이 쉽게 입학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도 1894년 갑신정변 때 폐지되었다.

평민들이 쉽게 입학할 수 있는 근대 서양식 학교는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배재학당은 188583일 미국 북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학생 2명으로 시작하여 이듬해 188668일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이란 교명을 사액함으로서 정식인가를 받은 결과가 되어 한국 근대교육의 효시가 되었다고 본다. 의료선교사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의 모친인 매리 스크랜톤(Mary F. Scranton)여사가 18856월 내한하여 1019채의 한옥을 매입한 후 새롭게 여자학당과 부녀원을 짓기 시작하여 1886년에 완성함에 따라 11월부터 시작하니 이때 조선 왕비가 이 학교를 이화학당이라고 교명을 지어줌으로서 이화학당은 명실 공히 한국의 최초 근대 여성교육의 산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6고아원이란 학교를 시작한 것이 소위 언더우드 학당, 혹은 예수학당, 구세학당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 경신학당으로 정착하여 오늘의 경신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그밖에 여의사 엘러스(Annie J. Eellers)선교사는 1887년 정신여학교 전신인 정동학당을, 존스부인(Mrs. George H. Jones)1890년 인천에서 영화학교를,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1897년 평양에서 숭실학당을, 그리고 1898년에 배화학당 등 서울과 지방의 도처에 외국 선교부 단독으로 또는 선교부와 한국지역 교인들과 합동으로 기독교 학교들이 속속 설립되어 한국의 근대교육을 더욱 촉진시켰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학교에서 평민 학생들이 음악을 배울 수 있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전국 여러 곳에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음악을 가르친 것이 동기가 되어 비로소 국가와 민간이 음악교육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0012월 서양식 군악대가 처음으로 창설되어 악기 연주자를 양성하였으며, 19086월 서울에 기호학교가 설립되고, 19099월 조양구락부(향후 조선정악전습소)가 설치되어 민간 음악교육기관으로서 중요한 자리 매김을 하였다.

 

(2) 최초 음악 수업에서의 찬송가

미국 선교부에서 인정하는 공식적인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한 1885년 즈음에 한국인이 한국 땅에서 한국 전통음악이외에 일반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특히, 서양음악을 배울 수 있는 곳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왜냐하면 한국에 서양음악이 처음 소개된 것은 1885년 이후 미국의 선교사들이 가져온 개신교의 찬송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서양식의 음악 교육이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서양 찬송가를 가르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음악교육 자료로서의 찬송가는 교회가 아닌 학당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공식적인 기록으로 볼 때 선교사들이 교회보다 학교를 먼저 세웠고 그들이 세운 학교에서 찬송가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여학교에서 음악을 그때는 창가라고 하였는데 주로 영어 찬미가를 번역하여 송 수산나 한데이세 교사들이 풍금을 치면서 가르쳤다라는 기록과 앞에서 언급한 이화학당에서의 기록을 볼 때 초창기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여러 학당에서 영어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설립 당시에 정해진 학과목이 없이 영어를 가르쳤으며, 교재는 주로 성경에 관련된 이야기, 혼은 주기도문과 쉬운 영어 찬송가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졌다. 왜냐하면 가르칠 교사가 확보되지 못하여 처음부터 정규 과목을 설정하고 개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확보되는 대로 그때마다 한 과목이 첨가되는 실정이었다. 배재학당은 1887년부터 설립자 자신이 찬송가를 좋아하고 잘 부를 수 있어서 창가 수업을 실시하였으며 이때의 수업내용은 정해진 교재가 없이 선교사가 먼저 영어로 찬송가를 부르면 학생들이 그대로 따라 부르는 정도였다. 이 시기에 활동하였던 주한 미국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된 문헌에서 피셔(J. E. Fisher)는 선교사들은 당연히 성경 연구, 기독교 윤리, 찬송가, 그리고 미국의 학교에서도 항상 중요시 여기는 교육 과정에 있는 과목들을 고려하고 있다라는 보고에 의하면 개화기 초기 서양식 학교에서 음악 과목의 명칭이찬송가 부르기(hymn singing, 찬송가 가창)” 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자연스런 일이 라고 할 수 있겠다.

1886년에 설립된 이화학당에서 처음에 공부라고 하는 것이 주기도문과 예수 사랑하심의 찬송가를 영어로 배우며 예배를 보는 것이다라는 기록을 볼 때, 그리고 1903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이을나의 증언에 의하면 매주 금요일 오후 3시에 미세스 헐버트 선교사가 찬미가를 가르쳤으며 당시 음악 교재가 변변치 못하여 찬송가를 교재로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볼 때 처음 서양식 음악 교육은 찬송가를 가르치고 따라 부르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때의 음악 교육은 처음에 주기도문예수 사랑하심은이란 찬송가를 영어로 배우고 예배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후 영어, 산술, 언문, 창가, 역사, 영어 문법, 글쓰기 등 이었다라는 내용을 보아 창가라고 하는 수업시간에 찬송가 부르는 것이 주요 음악학습 활동으로 되어 있었다.

1886년 언더우드가 설립한 언더우드 학당에서는 주로 기독교 교육을 치중하여 일반학과 외에 찬미와 기도 등을 가르쳤으며라는 기록이 있다. 이듬해 1887년 앨러스에 의해 설립된 정동 여학당의 초창기 과목은 일반과목을 비롯하여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쳤으며, 그리고 1890년 존스여사가 설립한 영화학교에서도 처음에 찬송가를 번역하여 가르쳤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이들 기독교 학교에서의 교육과정으로 성경, 기독교 윤리, 그리고 찬송가 가창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나머지 과목은 미국학교 교육의 교육과정에서 중요시 되는 과목으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1885년부터 시작된 서양식 학교에서 처음에 영어 찬송가를, 후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찬송가를 가르치면서 찬송가 가창(hymn singing) - 찬송가 부르기 - 이란 학과목으로 음악 수업이 실시됨에 따라 서양 음악교육이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고 본다. 특히, 1906년 이후에는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오르간과 이어서 여러 관현악기 및 피아노 등을 들여와서 악기 반주에 맞추어 가창 수업을 진행함에 따라 아동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한국의 학생들이 찬송가라는 교재를 통하여 서양의 리듬과 박자, 가락, 그리고 음계와 그 밖의 서양음악 이론을 학습함에 따라 서양음악에 대한 경험과 견문이 넓어져 결국 한국 땅에 서양음악의 풍토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바로 그 찬송가가 이와 같은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본다.

 

(3) 개화 초기 창가(唱歌) 교재로서의 찬송가

1890년대 이후부터는 창가라는 새로운 이름의 음악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하여 음악 수업시간에 이 명칭을 사용하였다. 개화 초기에 사용되었던 창가라 함은 두 가지 범주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노래 부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부르는 노래이다. 개화 초기에 학교에서 사용되었던 창가의 영역은 전자(前者)에 해당된다고 본다. 단순히 목소리로 어떤 곡조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오늘날 사용되는 가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서양식 학교의 음악 수업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창가는 찬송가와 같은 서양 음계로 구성된 악곡을 부르는 것을 뜻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의 창가라 함은 찬송가를 부르는 수업 시간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기독교 학교에서 최초의 음악수업은 찬송가 가창(찬송가 부르기)’ 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각주 39 참조). 따라서 개화 초기의 창가는 선교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점차 찬송가 가창대신에 창가라는 이름으로 과목이 바뀌면서 기독교적인 가사가 아닌 세속적인 가사로 된 노래도 다루게 되었다.

1890년에 설립된 인천의 영화여학교에서는 설립 당시부터 교육과정 속에 창가 시간이 있었다. 음악을 그때는 창가라고 하였는데 이때는 주로 찬미가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밖에 경신학교, 정신학교 등의 기독교 학교에서 설립 초창기부터 교육과정이 구비되면서 창가라는 과목이 설정되었으며 수업시간의 교재로서 찬송가가 사용되었다. 1900년대에 들어와 배재학당은 7년 학제로 된바 교육과정에 창가라는 과목을 포함시켰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보아 개화 초기 창가라는 과목은 단순히 찬송가를 배우는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03년에 이화학당을 졸업한 이을라(李乙羅)1908년에 졸업한 尹心成)의 말에 의하면 그 때에도 학교에 노래를 배우는 시간은 있었어도 창가라는 말은 없었다고 했으며, ‘음악 시간이나 창가 시간이란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는 증언으로 보아 일부 학교에서만 창가 시간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창가라는 교과목은 1906보통학교령 시행규칙이 발표하기 이전까지 그 명칭에 관계없이 그 수업 내용은 찬송가를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양식 기독교 학교에서의 음악 수업이 그러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창가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광무 4(1900) 설군악란(設軍樂欗) 악고 14권에 여러 나라의 악곡명을 열거한 중에 弔禮行進曲, 騎兵行進曲, 唱歌行進曲...”이라고 실려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창가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1900년 이후에 창가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창익의 문헌에 의하면 공식적인 창가의 용어는 1905년 각 급 학교 입학생 모집광고에 창가라는 전에 없던 과목이 생겼으며, 특히 1905년 평양에서 이성식 편 중등창가집이 간행되면서 창가들이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한편 국가 교육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창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1906년 이후로 나타나고 있다. 1906년에 공포된 보통학교령 시행규칙속에 비로소 창가라는 이름으로 음악이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공식적으로 삽입되면서 부터 단음창가 중심의 음악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제하에서 정부 주관으로 찬송가 또는 찬송가와 유사한 창가를 더 이상 부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1910년에 普通敎育唱歌集이 출판되면서 점차 찬송가는 창가 교재로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